반응형

출처 - 김동호목사님의 날마다 기막힌 새벽 (유튜브링크는 하단 참조)

 

사도행전 3장 1절 ~ 10절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은과 금"을 넘어 스스로 걷게 하는 기적: 자립 선교가 보여준 진정한 사랑의 기술

1. 도입부: 왜 우리의 선의는 종종 제자리걸음일까?

매년 전 세계 빈곤 지역으로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구호 물자와 기부금이 흘러 들어갑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질문해 봅시다. 과연 그 물길이 닿은 곳마다 가난의 굴레가 끊어지고 있습니까? 굶주린 이에게 빵을 건네는 '구제'는 숭고하지만, 그것이 그들을 평생 빵을 기다리는 수혜자로 머물게 한다면 우리는 '도움의 역설'을 마주하게 됩니다.

성경 사도행전 3장에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이에게 베드로가 건넨 파격적인 선언이 등장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여기서 '은과 금'은 당장의 생존을 위한 1차적 구호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기술은 그가 자신의 발로 세상을 딛고 서는 '자립', 즉 '일어나 걷는 것'에 있습니다. 단순히 물질을 나누는 안도감을 넘어, 한 인간의 존엄을 회복시키기 위해 필요한 치열하고도 정교한 자립의 메커니즘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립선교

2. [사례 1] 남산 쪽방촌의 기적: '개인'이 아닌 '공동체'가 만든 반전

서울 남산 쪽방촌에서 진행된 '미천나눔 운동'은 자립이 단순한 동정심이 아닌 '시스템 설계'의 영역임을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입니다. 초기 이 사업은 자립 의지가 있는 주민에게 1인당 300만 원씩 소액을 대출해 주는 전형적인 마이크로크레딧 방식을 취했으나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실패의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300만 원이라는 금액은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는 '비즈니스'를 구축하기엔 **임계 질량(Critical Mass)**이 턱없이 부족한 자본이었고, 무엇보다 빈곤의 본질인 '사회적 고립'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홀로 남겨진 소액 자본은 가혹한 시장 경제의 벽 앞에 무력했습니다.

이에 전략을 대폭 수정하여 개인 중심에서 공동체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했습니다. 12명을 한 팀으로 묶고, 총 6,000만 원의 자본금을 투입하여 규모의 경제와 사회적 책임망을 구축했습니다.

  • 김밥 천국: 12명의 팀원이 공동 운영하며 서로의 성실함을 견인한 결과, 운영 1년 만에 대출금 6,000만 원 전액 상환이라는 기적을 일궈냈습니다.
  • 이동 세차: 마이크로벤 2대를 구입해 전문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여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감동은 그다음 단계에서 완성됩니다. 공동체를 통해 회수된 6,000만 원은 다시 팀 내에서 가장 성실했던 팀원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이를 밑천 삼아 **'우렁쌈밥집'**을 창업하며 완전한 개인 자립에 성공했습니다. **"빈곤은 고립이며, 자립은 관계의 회복"**이라는 통찰이 증명된 순간이었습니다.

3. [사례 2] 쓰레기 산의 아이들, 대학교수급 전문가가 되다

캄보디아 단커 마을의 변화는 자립을 완성하는 핵심 요소가 '기술의 품격'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곳 아이들은 온 가족이 쓰레기 산을 뒤지며 악취 속에서 하루를 보내던 이들이었습니다. 에스겔 선교회는 이들에게 단순한 일거리가 아닌,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압도적인 기술력'을 전수하기로 했습니다.

단순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한국 최고의 헤어 살롱 원장급 마스터들이 직접 현지로 건너가 프리미엄 기술을 전수했습니다. 쓰레기 산의 악취에서 벗어나 최고급 살롱의 향기 속에서 전문직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아이들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 과거: 온 가족이 쓰레기를 주워 하루 종일 일해도 겨우 5달러 수입으로 연명.
  • 현재: 한국 최고 수준의 기술 습득 후 최고급 미용실 취업. 월수입 약 400달러 달성 (현지 대학교수 수준의 고소득).

이들은 이제 구걸하는 수혜자가 아니라, 타인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전문가로서 사회적 존엄성을 회복했습니다.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고부가가치 기술'의 전수가 어떻게 빈곤의 대물림을 끊는 가장 확실한 도구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4. 글로벌 확산: 말라위에서 탈북자 자립까지

이러한 자립 모델은 국경과 대상을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며 '삶으로 증명하는 하나님 나라'를 일궈내고 있습니다.

  • 말라위 구물리라 마을: 주민 스스로 모은 자본금에 재단이 자금을 더하는 매칭 펀드(Matching Funds) 모델의 협동조합을 설립했습니다. 주민들이 사업의 주체가 되어 빵 가게와 목공소를 운영하며 책임 있는 경제 주체로 성장했습니다.
  • 탈북자 지원: 라면 프랜차이즈 등 정교한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경제적 독립을 지원했습니다. 탈북 10년 만에 본인의 아파트를 마련하는 등, 이들은 더 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닌 당당한 시민으로 정착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활동의 중심에는 **BAM(Business As Mission)**의 정신이 흐르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전도 구호보다 더 강력한 복음은, 무너진 삶의 기반을 비즈니스로 복원하여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되찾아주는 비즈니스 자체가 곧 가장 숭고한 선교입니다.

5. 고찰: 자립은 구제보다 훨씬 더 '비싸고 어렵다'

사회 혁신적 관점에서 볼 때, 자립 지원은 일회성 구제보다 훨씬 높은 기회비용과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왜 자립 선교가 '고난도 전문가의 영역'인지 세 가지 이유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막대한 자본과 기회비용: 빵 한 덩이를 주는 것보다, 시장에서 생존 가능한 비즈니스 인프라(밑천)를 구축하고 교육하는 데는 훨씬 많은 자본과 긴 인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2. 시행착오의 리스크 관리: 남산의 초기 사례처럼 비즈니스 모델은 실패의 위험이 큽니다. 이를 수정하고 보완하며 끝까지 견뎌낼 수 있는 정교한 전략과 정서적 에너지가 필수적입니다.
  3. 전문성의 격차: 시장은 냉혹합니다. 전문가가 결합된 고도의 기술 교육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립은 구호에 그치는 '취미 활동'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렇기에 자립을 돕는 일은 실패의 위험까지 기꺼이 짊어지겠다는 '전략적 사랑'의 결단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6. 결론: 이제 우리는 무엇을 '밑천'으로 내어줄 것인가?

진정한 자비는 상대방을 영원한 수혜자로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시는 나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단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은과 금'의 단계를 넘어, 적절한 규모의 자본(밑천)과 공동체적 시스템, 그리고 시장에서 통하는 최고급 기술이 결합될 때 비로소 "일어나 걸으라"는 기적은 현실이 됩니다.

이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은과 금을 쥐여주는 안도감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그가 다시는 굽히지 않고 걷도록 삶의 밑천을 함께 만들 것인가?"

우리의 선의가 그들의 내일을 바꾸는 진정한 동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누군가의 '밑천'이 되어주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반응형
반응형

출처 - 김동호목사님의 날마다 기막힌 새벽 (유튜브링크는 하단 참조)

 

사도행전 2장 43절 ~ 47절

  1.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2.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3.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5.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세상의 불공평함 속에 숨겨진 '생명의 코드': 말라위에서 발견한 역설적 희망

우리는 왜 불공평함에 분노하며, 그 너머엔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운명적인 불균형 앞에 종종 무력감을 느낍니다. 누군가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풍요를 누리지만, 누군가는 태어남과 동시에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극심한 빈부 격차, 그리고 건강과 기회의 불평등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분노를 자아내게 합니다. 이 어긋난 질서는 마치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조금은 불편하고도 역설적인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 세상이 완벽하게 평평하다면, 그곳에 과연 '생명'이 살 수 있을까요?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모든 생명 현상은 역설적이게도 '불공평함', 즉 '차이'가 존재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내용의 통찰에 따르면, 불공평함이 있어야만 흐름이 발생하고, 그 흐름이야말로 생명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동력이 됩니다.

생명의코드

격차, 생명을 태동시키는 필연적인 기울기

자연의 섭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저장단(高低長短)과 강약의 조화가 얼마나 경이로운지 알 수 있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대지를 적시고, 공기는 기압의 차이에 의해 이동하며 바람을 일으킵니다. 우리 몸의 피 역시 압력의 고저에 따라 전신을 순환하며 생명을 지탱합니다. 만약 세상에 높낮이가 없고 기압의 차이가 사라진다면, 모든 흐름은 멈추고 생태계는 정지된 죽음의 상태에 빠질 것입니다.

경제와 사회 구조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는 단순히 제거해야 할 악이 아니라, 무언가를 흐르게 하기 위한 '잠재적 에너지'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강한 자에게서 약한 자에게로 자원이 이동하는 '순행'의 원리가 작동할 때, 그 사회는 비로소 건강한 생명력을 얻습니다. 즉, 격차 그 자체가 비극이 아니라, 그 격차를 이용해 '어떤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느냐가 한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핵심입니다.

사망의 역행과 생명의 순행, 그 운명적인 갈림길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상반된 방향의 흐름을 목격합니다. 이 흐름의 방향성이 공동체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먼저 '사망의 흐름'이라 불리는 역행적 성격이 있습니다. 이는 약한 데서 강한 데로, 가난한 데서 부한 데로 자본이 쏠리는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입니다. 우리는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이 비정한 흐름을 뼈아프게 경험했습니다. 살인적인 고금리 정책 속에서 가난한 이들의 피땀 어린 돈은 이자가 되어 부유한 이들의 금고로 흘러 들어갔고, 공동체의 허리는 끊어졌습니다. 이는 욕심이 만들어낸 부자연스러운 역류였습니다.

반면, '생명의 흐름'은 강한 데서 약한 데로 흐르는 사랑의 순행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던 초대교회의 '통용' 문화가 그 찬란한 모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권리로 주장하지 않고,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원을 흘려보냈습니다. 이러한 건강한 순환이 일어날 때 공동체 안에는 기쁨과 순전한 마음이 넘치게 됩니다.

"사망의 흐름은 약자의 것을 강자가 취하는 욕심의 역행인 반면, 생명의 흐름은 강자가 약자에게 흘려보내는 사랑의 순행입니다."

구물리라에서 마주한 경제의 선순환, '요셉 프로젝트'

이러한 생명의 흐름을 추상적인 구호가 아닌, 정교한 경제 구조로 실현해낸 현장이 있습니다. 바로 아프리카 말라위의 구물리라 마을에서 진행된 '요셉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시혜적 구호를 넘어, 기존의 착취적 고리대금 구조를 '생명의 설계'로 완전히 뒤바꾸었습니다.

과거 주민들은 추수기에 헐값에 옥수수를 팔고, 정작 배고픈 보릿고개에는 5배나 비싼 가격에 사야 하는 악순환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요셉 프로젝트는 이 왜곡된 기울기를 바로잡기 위해 재단이 시세보다 50% 높은 가격으로 옥수수를 수매하고, 흉년에는 시세보다 저렴하게 공급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 과정에서 발생한 약 33%의 수익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고 마을에 재투자하여, 월 50~70불 수준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50여 개나 창출했다는 사실입니다.

더불어 코이카(KOICA)의 지원으로 설립된 '농기구 뱅크'는 도구가 없어 노동력을 낭비하던 주민들에게 장비를 대여해주고 수확 후 비용을 갚게 함으로써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였습니다. 이러한 '비즈니스적 선교 모델'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굶주림이 사라지자 아이들은 "Korea"를 외치며 희망을 노래하기 시작했고, 떠나려 했던 주부들은 "이제 이곳에 정착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강자의 자원을 낮은 곳으로 흘려보냈을 때, 무너졌던 공동체가 사회적·영적으로 소생되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 가시화된 것입니다.

영적해방

움켜쥔 손을 펴게 하는 영적 해방의 신비

사실 강한 자가 자신의 것을 약한 자에게 흘려보내는 것은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올까요? 사회 평론가이자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단순한 도덕적 결단이 아닌 '가치관의 근본적인 전복'이 필요합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를 '성령 체험'이라 부릅니다. 성령을 통해 세상보다 거대한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자원에 대한 집착과 욕심에서 해방됩니다. 욕심이 사라진 자리는 "꼭 쥐고 있던 손"을 펴게 만듭니다. 내가 가진 자원을 내 소유라는 감옥에 가두지 않고 필요한 곳으로 흘려보낼 때, 비로소 정체되었던 공동체에 생명의 맥박이 뛰기 시작합니다. 움켜쥔 손을 펴는 행위야말로 성령 받은 증거를 삶으로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경제적 실천입니다.

에스겔의 강물처럼, 이제 우리가 흘려보낼 차례입니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탈바꿈한 '흐름의 수혜자'입니다. 과거 우리가 가장 가난했을 때, UN과 국제사회가 보내온 생명의 흐름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받은 그 '흐름의 빚'을 갚아야 할 시간입니다.

현재 활동 중인 '에스겔 선교회'의 정신처럼,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닿는 곳마다 죽었던 것들이 소성(蘇醒)되는 환상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거창한 전략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 값을 아끼는 작은 실천이 말라위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손에 꽉 쥐고 있는 그 자원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낮은 곳으로, 약한 곳으로 흘려보내기로 결단하는 순간, 당신의 삶과 주변에는 진정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가 손을 펼 때, 비로소 세상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https://youtu.be/XJFHKUDf_gY?si=81vcrRf-Z7HFKVXC

 

반응형
반응형

출처 - 김동호목사님의 날마다 기막힌 새벽 (유튜브링크는 하단 참조)

 

사도행전 2장 21절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당신의 기도를 완전히 바꿔놓을 3가지 역설

서론: 기도가 막막하게 느껴질 때

기도가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해야 할 의무처럼 느껴지거나, 아무런 감흥 없는 독백처럼 공허하게 흩어질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유창하고 거룩한 기도를 드려야만 하나님이 들으실 것이라 생각하지만, 가장 깊은 기도의 신비는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언어가 가장 화려할 때가 아니라, 모든 언어를 잃어버린 침묵의 순간에 찾아옵니다.

한 평생 목회에 헌신한 목회자의 깊은 묵상 속에서 건져 올린, 우리의 기도 생활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놀랍고 역설적인 3가지 통찰을 나누고자 합니다.

--------------------------------------------------------------------------------

1. '잘하는' 기도보다 '진실한' 기도가 중요하다

기도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기도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려줍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아니라, ‘사람들 들으라고’ 하는 공연이었습니다. 그는 길거리에 서서 큰 소리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신앙인인지 자랑했습니다. 십일조와 금식 같은 자신의 업적을 나열하고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며 다른 이와 비교하며 우월감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 중심에 있는 과시욕을 아셨기에, 그 기도를 진정한 기도로 받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골방'의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힘은 유창함이나 길이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단순하고 진실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우리 안에도 기도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싶은 바리새인의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내려놓고 단순함과 진실함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의 진정한 소통을 여는 첫걸음입니다.

2. 때로는 '부르짖음'이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

한 평생 전통적인 장로교 목회자로 살아온 김동호 목사님은 어느 날 순복음교회 집회에 초청받았던 경험을 나누며,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자신과는 너무 다른 예배 스타일에 당황한 것입니다. 찬송은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불렀고, 사람들은 큰 소리로 손뼉을 치며 "주여 삼창"을 외쳤습니다. 처음에는 '교회를 잘못 찾아왔나' 싶을 정도로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뜨거운 부르짖음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저들의 마음 밭이 참 부드럽구나. 저렇게 부르짖고 큰소리로 뜨겁게 하는 동안에 마음 밭이 잘 갈아진 것 같더라고요.

이 경험은 기도에 '정답'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기도의 핵심은 진실함이지만, 그 표현 방식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뜨거운 부르짖음이, 우리도 모르게 쌓아온 형식주의의 벽을 허물고 하나님 앞에 감정의 중심까지 쏟아놓게 하는 유효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동기가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도가막힐때

3.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 가장 완벽한 기도가 시작된다

살다 보면 너무 큰 고통에 압도되어 기도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기도문 한 줄 쓸 수 없으며, 숨쉬기조차 버거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죄가 되기에 참고 견딜 뿐’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기도의 가장 위대하고 해방적인 진리가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런 순간에는 억지로 유창한 기도를 쥐어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장 단순한 행위, 그것 자체가 완전하고 완벽한 기도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약속을 들려줍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이것이 왜 그토록 강력할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입을 열기 전부터 우리의 필요를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한 문장이나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주여"라는 짧은 부르짖음 안에는 우리의 모든 고통과 절박함,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는 찬송의 고백처럼, "하나님 외에는 제게 아무런 도움이 없습니다"라는 가장 정직한 선언입니다. 여기서 '누구든지'라는 약속은 우리의 상태나 자격과 상관없이, 가장 비참한 순간에 있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

결론: 기도는 증명이 아니라 고백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나의 신앙을 증명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화려한 언변이나 뜨거운 형식으로 포장된 퍼포먼스도 아닙니다. 기도는 그저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진실한 행위 그 자체입니다.

조용한 골방에서 드리는 진실한 고백이든, 굳은 마음을 깨뜨리는 뜨거운 부르짖음이든, 혹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터져 나오는 침묵의 이름 부름이든, 가장 가치 있는 기도는 "하나님, 당신 밖에는 나의 도움이 없습니다"라고 정직하게 시인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만약 오늘부터 기도를 '잘해야 하는 과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으로 여긴다면 당신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https://youtu.be/2EuGwEMbz5c?si=VFoz08-jHfRDqUxn

 

 

반응형
반응형

사도행전 2장 5절 ~ 13절

  1.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2.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3.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4.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5.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6.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7.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8.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9.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 어쩌면 최고의 칭찬일지 모릅니다: 성령에 취해 산다는 것의 4가지 역설

Introduction: 우리 모두는 무언가에 '취해' 산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에 깊이 빠져, 즉 '취하여' 살아갑니다. 어린 시절, 저는 주벽이 있는 아버지 때문에 '취한다'는 것에 본능적인 공포와 혐오감을 가졌습니다. 제정신을 잃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모습은 제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술주정이 아니라, 존경하는 어른이 가장 온전해야 할 '정신'을 잃어버리는 모습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생 의식적으로 '취하는' 것을 경계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제 삶 역시 열정적인 '취함'의 순간들로 가득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그 대상이 파괴가 아닌 생명을 향해 있었다는 점이 달랐을 뿐입니다. 운동에 취해 점심을 거르고 6시간씩 테니스를 치기도 했고, 음악에 취해 밤을 새우며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고 느낄 만큼의 감동에 젖기도 했습니다. 좋은 책 한 권에 취해 완전히 소화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고 다른 이에게 가르치며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무언가에 깊이 몰입하는 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님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깊고 완전하며, 삶을 변화시키는 몰입의 대상은 무엇일까요? 만약 인생을 가장 온전히 사는 방법이, 전혀 다른 무언가에 '취하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바로 '성령에 취한다'는 이 급진적이고도 본질적인 개념을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1. 역설 1: 당신이 '제정신'이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왜곡된 상태일 수 있다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역설부터 시작해 봅시다. 우리가 흔히 정상이라고 말하는 '제정신'은 사실 죄로 인해 타락하고 왜곡된 상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기준 자체가 뒤바뀌어 버린 정신 상태 말입니다.

이에 반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제정신'은 세상적인 의미의 멀쩡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거듭나 비로소 회복된 상태, 즉 하나님의 정신과 영, 그리고 그분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쌓아 올린 지혜와 상식의 기반을 흔드는 선언입니다. 나의 가장 합리적인 판단조차 죄의 중력에 이끌려 왜곡되었을 수 있음을 인정하라는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도전은 절망이 아닌 희망의 시작입니다. 나의 정신이 아닌, 하나님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취한 삶

2. 역설 2: 인생을 망치는 중독 vs. 삶을 살리는 몰입

세상에는 두 종류의 '취함'이 있습니다. 하나는 파괴적인 중독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몰입입니다. 술, 마약, 도박과 같은 세상적인 중독은 사람의 제정신을 잃게 하고, 엉뚱한 말을 내뱉게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과 공포를 안겨줍니다. 그 끝은 결국 인생의 파멸입니다.

하지만 성령에 취하는 것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습니다. 그것은 삶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고, 세상적인 욕심과 돈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의 삶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에 유익을 줍니다.

세상의 눈에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은 '진정한 제정신'을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죄로 인해 뒤바뀐 가치관을 바로잡아 하나님의 영과 마음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른 정신으로 사는 법입니다.


3. 역설 3: 세상의 보물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된다

'성령에 취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가치관의 근본적인 혁명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120명의 제자들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그들은 이전까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돈과 세상적인 성공을 '배설물'처럼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가치관의 혁명은 곧장 삶의 방식으로 흘러넘쳤습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자, 자신의 것을 나누는 '유무상통'은 의무가 아닌 가장 기쁘고 당연한 삶의 표현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세상이 '취했다'고 비난했던 그 모습이야말로 그들이 '진정한 제정신'을 되찾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4. 역설 4: 믿는 것이 아니라 '맛보아' 알아야 한다

이 거룩한 취함은 의무감으로 가득한 건성 신앙으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머리로 믿는 것을 넘어, 온몸으로 '맛보아 아는' 체험적인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테니스의 짜릿한 '맛'을 알아야 점심도 거르고 여섯 시간을 뛸 수 있고, 음악의 깊은 '맛'을 알아야 밤을 새워 몰입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것의 진짜 '맛'을 깊이 경험해야만 평생 하나님께 취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을까요? 제 삶을 통해 붙잡게 된 몇 가지 통로가 있습니다.

  • 말씀에 취하기: 말씀을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될 때까지 읽고 또 읽으며, 나아가 다른 이에게 가르쳐보십시오. 지식으로만 머물던 말씀이 나의 영과 삶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 찬양에 취하기: 밤을 새워 찬양에 깊이 몰입하는 '철야 찬양'과 같이, 모든 것을 잊고 오직 은혜에만 젖어 드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이는 신앙의 근간을 세우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 기도에 매달리기: 자신의 연약함이나 한계 앞에서 물러서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것을 붙들고, 때로는 고집스럽다 싶을 만큼 하나님께 매달리며 돌파를 구할 때, 우리는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게 됩니다.

Conclusion: 당신의 삶은 무엇에 취해 있습니까?

진정한 영적 삶이란 모든 종류의 취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올바른 대상에 제대로 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 안에서의 깊은 몰입이며, 이 몰입은 죄로 왜곡된 우리를 '진정한 제정신'으로 회복시키고 삶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성령에 취한 삶은 세상의 눈에는 이상하고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가장 온전한 현실인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살아내는 가장 실제적인 길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당신을 파괴적인 중독으로 이끌고 있습니까, 아니면 삶을 살리는 거룩한 몰입으로 이끌고 있습니까?"

 

https://youtu.be/GT_uNUSngsA?si=URXahlwpHg4d23bb

 

반응형
반응형

사도행전 2장 1절 ~ 4절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장 1절에서 4절 말씀을 바탕으로, 성령 강림이 가져온 변화와 그로 인해 회복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을 5가지 핵심 주제로 정리해 드립니다.

1. 바벨탑 사건의 회복: 언어의 혼잡에서 마음의 통함으로

성령 강림 사건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과 정반대되는 회복의 역사입니다.

  • 바벨탑의 형벌: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려 했을 때,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사람들을 흩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을 넘어,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해 마음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 오순절의 회복: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게 나타난 방언은 흩어졌던 언어가 다시 하나로 묶이는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다시 마음이 통하게 되었고, 흩어지는 대신 모이기를 힘쓰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2. 성령 충만의 본질: 가치관과 영적 분별력의 변화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근본적인 영이 바뀌는 것입니다.

  • 분별력의 회복: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참과 거짓, 진짜 복과 가짜 복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 가치관의 변화: 성령으로 거듭나면 세상적인 욕심이 사라지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며, 생각과 가치관, 인생관이 하나님의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3. 하나님 나라의 실현: 유무상통과 평화

하나님 나라는 환경이 바뀌어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이 성령으로 거듭날 때 그 자리에서 즉시 이루어집니다.

  • 욕심의 제거: 성령을 통해 욕심이 없어지면 다툼이 사라지고 사랑과 평화가 임합니다.
  • 초대교회의 모습: 자신의 것을 내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각자의 필요를 따라 함께 쓰는 '유무상통'의 공동체가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4. 하나님의 형상 회복: 하나님을 닮은 증인의 삶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창조 당시의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게 됩니다.

  • 하나님을 닮음: 하나님의 형상은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영, 생각,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 말과 행동의 변화: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길입니다.

5.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 (거룩한 욕심)

우리가 평생 예수를 믿어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세상의 욕심은 가득하지만, 정작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거룩한 욕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 우리가 간절히 사모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 우리가 머무는 가정과 직장, 그리고 교회가 기적처럼 하나님 나라로 변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전 대화에서 말씀드린 '데오빌로(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마음과 '증인'의 삶은 결국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가치관을 소유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이 소스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과 오순절 성령 강림은 어떤 관계가 있나요?

바벨탑 사건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정반대되는 성격의 역사이자, 전자가 초래한 비극을 후자가 치유한 '회복의 관계'**에 있습니다. 소스에 기초한 두 사건의 구체적인 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언어의 혼잡에서 마음의 통함으로의 회복

바벨탑 사건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려 했던 오만함에 대한 형벌로 언어가 혼잡해지고 소통이 단절된 사건입니다. 단순히 말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을 넘어,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해 서로의 '마음'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이 바벨탑 사건의 본질적인 비극이었습니다. 반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방언을 함으로써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소통하게 된 '언어의 회복' 사건입니다.

2. 흩어짐에서 모임으로의 변화

바벨탑 사건의 결과로 인류는 온 지면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하나가 된 사람들이 **다시 모이기를 힘쓰는 공동체(초대교회)**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즉, 성령은 바벨탑이 갈라놓았던 인류를 다시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습니다.

3. 이기적 욕심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바벨탑을 쌓게 만든 근본 원인은 "내가 주인이 되겠다"는 이기적인 욕심이었습니다. 이 욕심은 분별력을 상실하게 하고 다툼과 갈등을 초래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이러한 세상적인 욕심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거듭나게 함으로써, 자신의 것을 내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나누는 '유무상통'의 공동체, 즉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켰습니다.

4. 하나님의 형상 회복

바벨탑 사건이 하나님의 영을 상실하여 인간이 어리석어지고 분별력을 잃은 사건이라면,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는 사건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과 가치관을 갖게 되어,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닮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바벨탑 사건이 죄로 인해 인간관계와 신인관계가 파괴되고 흩어진 사건이라면,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성령을 통해 그 관계가 회복되고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가 다시 시작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벨탑에서 오순절로

성령을 통한 유무상통의 삶은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실천될까요?

소스에 따르면, 성령을 통한 **'유무상통(有無相通)'**의 삶은 단순히 물질을 나누는 경제적 행위를 넘어, 성령으로 인한 내면의 변화가 일상의 관계와 가치관 속에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기적 욕심을 버리고 '나의 것'이라는 집착 내려놓기

유무상통의 핵심은 이기적인 욕심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이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욕심에서 비롯된 분열이었다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더 이상 자신의 것으로만 주장하지 않게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내가 가진 물질이나 재능을 나의 독점적 권리로 여기지 않고,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나누려는 가치관의 근본적인 변화가 실천의 시작입니다.

2. '마음이 통하는 소통'을 통한 관계 회복

바벨탑 사건으로 깨어졌던 소통이 성령을 통해 회복되었듯이, 현대 사회에서 유무상통을 실천하는 것은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을 섞는 것을 넘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써 흩어지기보다 모이기를 힘쓰는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이 유무상통의 현대적 실천입니다.

3. 일상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유무상통의 삶은 특별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영이 바뀔 때 즉시 이루어집니다.

  • 가정과 직장: 내가 머무는 곳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으로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 봉사와 섬김: 누군가를 도울 때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타인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4. '세상 복'이 아닌 '진짜 복'을 추구하는 분별력

성령을 받으면 무엇이 참된 복인지 분별하는 영적 지혜가 생깁니다. 세상의 것들을 절대적인 가치로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우선순위에 둘 때, 우리는 물질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유무상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욕심 대신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거룩한 욕심'**을 가질 때, 우리의 삶은 기적처럼 하나님 나라로 변하게 됩니다.

5. 삶의 흔적(증거)을 남기는 실천

말씀이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고 **'삶의 영'**이 되어야 합니다. 이전 대화에서도 언급되었듯, 하나님을 가족처럼 사랑하고 그분을 일상의 '식구'로 인정하며 내 삶의 몫을 나누는 구체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실상과 증거들이 쌓일 때, 현대 사회의 각박한 현장 속에서도 초대교회와 같은 유무상통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현대 사회에서의 유무상통은 성령을 통해 나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하나님의 것으로 바뀌어, 내가 가진 것을 기쁨으로 나누고 주변 사람들과 마음으로 소통하며 그 자리를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가는 삶을 통해 실천됩니다.

 

https://youtu.be/Ejm4ztJl_gM?si=YfMtNDPmzdZzKFB7

 

 

 

반응형
반응형

사도행전 1장 1절 ~ 3절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데오빌로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의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데오빌로'의 의미와 사도행전의 수신자

사도행전의 수신자인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데오=하나님, 빌로=사랑). 그는 실존 인물일 수도 있으나,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독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데오빌로'가 되어 사도행전의 말씀을 남이 아닌 나에게 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2. 하나님 나라의 핵심 가치: 사랑과 평화

  • *하나님 나라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평화(샬롬)'**이며, 이 **평화의 원천은 바로 '사랑'**입니다. 세상은 욕심과 미움으로 인해 갈등과 전쟁이 끊이지 않지만, 사랑이 있을 때 진정한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3. 사랑의 확장: 동물에서 사람, 그리고 하나님까지

저자는 사랑이 인간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가치인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설명합니다.

  • 동물 사랑: 어린 시절부터 개와 고양이를 기르며 동물과 교감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풍족해지고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했습니다.
  • 사람 사랑: 학교(높은뜻 씨앗학교) 아이들을 안아주고 진심으로 예뻐하며 얻은 행복, 그리고 아프리카 말라위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넘어 '예쁘다'고 느끼며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사역의 역사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름다워졌음을 회고합니다.
  • 하나님 사랑: 가장 최고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고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삶

저자는 재산을 가족들과 나누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여섯 식구' 중 한 명이 아닌, 자신의 '아버지'이자 가족의 구성원(일곱 번째 식구)으로 인정하여 재산의 1/7을 드렸던 일화를 소개합니다. 이때 그 금액이 아깝지 않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큰 기쁨을 느꼈다고 전합니다.

5. 결론: 이 시대의 데오빌로가 되는 축복

하나님을 믿는 단계를 넘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오빌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늘 못 잊어 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갈 때, 성경의 말씀이 우리 삶에 살아 있는 축복의 역사로 이어지게 됩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가족처럼 사랑하고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하나님을 관념적인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진정한 가족처럼 사랑하고 일산에서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을 실제적인 '가족 구성원'으로 인정하기

가장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삶의 중요한 결정이나 자산을 나눌 때 하나님을 우리 식구 중 한 명으로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 실천 사례: 소스의 저자는 재산을 가족들과 나눌 때, 자신을 포함한 여섯 식구(어머니, 부부, 세 아들)에 하나님을 더해 **'일곱 번째 식구'**로 계산했습니다.
  • 마음가짐: 입으로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 계산에서도 그 몫(1/7)을 떼어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내 가족임을 삶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2. 아까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랑 확인하기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나 물질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진정한 가족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 자식에게 무언가를 줄 때 아깝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기쁨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가족으로 사랑한다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3. 일상의 아름다운 것을 하나님과 나누기(늘 못 잊어 하는 마음)

소스에서 인용한 '작자 미상의 시'처럼, 일상의 소소하고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 겨울철의 따사로운 햇볕이나 봄철 미나리의 살진 맛처럼, 내가 누리는 좋은 것들을 보며 하나님을 떠올리고 그분께 드리고 싶어 하는 **'늘 못 잊어 하는 마음'**이 일상 속 사랑의 실천입니다.

4.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단계를 넘어 '예쁘게' 바라보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이 만드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집니다.

  •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단순히 '불쌍하다'고 여겨 돕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존재 자체를 '예쁘다'고 느끼며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 아이들을 안아주고 진심으로 예뻐하는 마음으로 대할 때,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행복이 임하게 됩니다,.

5. 주변의 작은 생명들부터 사랑하기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기 위해, 동물이나 자연과 같은 작은 생명들부터 아끼고 사랑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동물과 교감하며 사랑을 주고받는 경험은 우리 삶을 풍족하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일상 속에서 **'데오빌로(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가 된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에게 주시는 살아있는 가족의 메시지로 받는 삶을 의미합니다.

 

https://youtu.be/jFybNOdRS6g?si=JOQY0VvX-IK42sXp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