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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김동호목사님의 날마다 기막힌 새벽 (유튜브링크는 하단 참조)

 

사도행전 2장 43절 ~ 47절

  1.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2.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3.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5.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세상의 불공평함 속에 숨겨진 '생명의 코드': 말라위에서 발견한 역설적 희망

우리는 왜 불공평함에 분노하며, 그 너머엔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운명적인 불균형 앞에 종종 무력감을 느낍니다. 누군가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풍요를 누리지만, 누군가는 태어남과 동시에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극심한 빈부 격차, 그리고 건강과 기회의 불평등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분노를 자아내게 합니다. 이 어긋난 질서는 마치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조금은 불편하고도 역설적인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 세상이 완벽하게 평평하다면, 그곳에 과연 '생명'이 살 수 있을까요?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모든 생명 현상은 역설적이게도 '불공평함', 즉 '차이'가 존재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내용의 통찰에 따르면, 불공평함이 있어야만 흐름이 발생하고, 그 흐름이야말로 생명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동력이 됩니다.

생명의코드

격차, 생명을 태동시키는 필연적인 기울기

자연의 섭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저장단(高低長短)과 강약의 조화가 얼마나 경이로운지 알 수 있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대지를 적시고, 공기는 기압의 차이에 의해 이동하며 바람을 일으킵니다. 우리 몸의 피 역시 압력의 고저에 따라 전신을 순환하며 생명을 지탱합니다. 만약 세상에 높낮이가 없고 기압의 차이가 사라진다면, 모든 흐름은 멈추고 생태계는 정지된 죽음의 상태에 빠질 것입니다.

경제와 사회 구조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는 단순히 제거해야 할 악이 아니라, 무언가를 흐르게 하기 위한 '잠재적 에너지'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강한 자에게서 약한 자에게로 자원이 이동하는 '순행'의 원리가 작동할 때, 그 사회는 비로소 건강한 생명력을 얻습니다. 즉, 격차 그 자체가 비극이 아니라, 그 격차를 이용해 '어떤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느냐가 한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핵심입니다.

사망의 역행과 생명의 순행, 그 운명적인 갈림길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상반된 방향의 흐름을 목격합니다. 이 흐름의 방향성이 공동체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먼저 '사망의 흐름'이라 불리는 역행적 성격이 있습니다. 이는 약한 데서 강한 데로, 가난한 데서 부한 데로 자본이 쏠리는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입니다. 우리는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이 비정한 흐름을 뼈아프게 경험했습니다. 살인적인 고금리 정책 속에서 가난한 이들의 피땀 어린 돈은 이자가 되어 부유한 이들의 금고로 흘러 들어갔고, 공동체의 허리는 끊어졌습니다. 이는 욕심이 만들어낸 부자연스러운 역류였습니다.

반면, '생명의 흐름'은 강한 데서 약한 데로 흐르는 사랑의 순행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던 초대교회의 '통용' 문화가 그 찬란한 모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권리로 주장하지 않고,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원을 흘려보냈습니다. 이러한 건강한 순환이 일어날 때 공동체 안에는 기쁨과 순전한 마음이 넘치게 됩니다.

"사망의 흐름은 약자의 것을 강자가 취하는 욕심의 역행인 반면, 생명의 흐름은 강자가 약자에게 흘려보내는 사랑의 순행입니다."

구물리라에서 마주한 경제의 선순환, '요셉 프로젝트'

이러한 생명의 흐름을 추상적인 구호가 아닌, 정교한 경제 구조로 실현해낸 현장이 있습니다. 바로 아프리카 말라위의 구물리라 마을에서 진행된 '요셉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시혜적 구호를 넘어, 기존의 착취적 고리대금 구조를 '생명의 설계'로 완전히 뒤바꾸었습니다.

과거 주민들은 추수기에 헐값에 옥수수를 팔고, 정작 배고픈 보릿고개에는 5배나 비싼 가격에 사야 하는 악순환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요셉 프로젝트는 이 왜곡된 기울기를 바로잡기 위해 재단이 시세보다 50% 높은 가격으로 옥수수를 수매하고, 흉년에는 시세보다 저렴하게 공급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 과정에서 발생한 약 33%의 수익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고 마을에 재투자하여, 월 50~70불 수준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50여 개나 창출했다는 사실입니다.

더불어 코이카(KOICA)의 지원으로 설립된 '농기구 뱅크'는 도구가 없어 노동력을 낭비하던 주민들에게 장비를 대여해주고 수확 후 비용을 갚게 함으로써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였습니다. 이러한 '비즈니스적 선교 모델'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굶주림이 사라지자 아이들은 "Korea"를 외치며 희망을 노래하기 시작했고, 떠나려 했던 주부들은 "이제 이곳에 정착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강자의 자원을 낮은 곳으로 흘려보냈을 때, 무너졌던 공동체가 사회적·영적으로 소생되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 가시화된 것입니다.

영적해방

움켜쥔 손을 펴게 하는 영적 해방의 신비

사실 강한 자가 자신의 것을 약한 자에게 흘려보내는 것은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올까요? 사회 평론가이자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단순한 도덕적 결단이 아닌 '가치관의 근본적인 전복'이 필요합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를 '성령 체험'이라 부릅니다. 성령을 통해 세상보다 거대한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자원에 대한 집착과 욕심에서 해방됩니다. 욕심이 사라진 자리는 "꼭 쥐고 있던 손"을 펴게 만듭니다. 내가 가진 자원을 내 소유라는 감옥에 가두지 않고 필요한 곳으로 흘려보낼 때, 비로소 정체되었던 공동체에 생명의 맥박이 뛰기 시작합니다. 움켜쥔 손을 펴는 행위야말로 성령 받은 증거를 삶으로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경제적 실천입니다.

에스겔의 강물처럼, 이제 우리가 흘려보낼 차례입니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탈바꿈한 '흐름의 수혜자'입니다. 과거 우리가 가장 가난했을 때, UN과 국제사회가 보내온 생명의 흐름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받은 그 '흐름의 빚'을 갚아야 할 시간입니다.

현재 활동 중인 '에스겔 선교회'의 정신처럼,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닿는 곳마다 죽었던 것들이 소성(蘇醒)되는 환상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거창한 전략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 값을 아끼는 작은 실천이 말라위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손에 꽉 쥐고 있는 그 자원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낮은 곳으로, 약한 곳으로 흘려보내기로 결단하는 순간, 당신의 삶과 주변에는 진정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가 손을 펼 때, 비로소 세상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https://youtu.be/XJFHKUDf_gY?si=81vcrRf-Z7HFKV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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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김동호목사님의 날마다 기막힌 새벽 (유튜브링크는 하단 참조)

 

사도행전 2장 37절 ~ 42절

  1.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2.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5.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6.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텅 빈 신앙을 채우는 4가지 방법: 당신의 삶이 곧 메시지가 될 때

서론: 시작하는 글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 지식도 쌓였지만, 정작 삶은 변하지 않고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주지 못해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 내 신앙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할까?", "왜 가장 가까운 가족들은 내 신앙에 감동받지 못할까?" 와 같은 질문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이 글은 단순한 지식을 넘어, 당신의 삶으로 증명되는 '진짜 신앙'의 핵심 원리 4가지를 소개합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텅 빈 공허함을 채우고, 당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실상과 증거'가 되기를 원한다면, 이 글이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1. '아는 신앙'에서 ' 살아내는 신앙'으로: 첫 번째 전환점

1. 지식 쌓기를 멈추고 '말씀의 육신화'를 시작하라

많은 신앙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삶에서 행하지 않기 때문에 열매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그 자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듯, '말씀의 육신화'란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아주 구체적인 현장에 하나하나 적용하며 살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신앙을 머릿속 관념에서 삶의 '실상(實相)'으로 바꾸는 첫걸음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지식으로만 머무는 신앙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지만, 말씀을 삶으로 살아낼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맛보아 아는' 진짜 경험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은 비로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2. '보여주기 위한 신앙'에서 '흔적을 남기는 신앙'으로: 두 번째 전환점

2. 종교적 경력을 버리고 '예수의 흔적(스티그마)'을 구하라

그렇게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고된 여정은 우리에게 반드시 무언가를 남깁니다. 우리는 종종 직분, 신앙 경력, 헌금 액수 같은 '체크리스트 신앙'이 믿음의 증거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짜 증거는 그런 외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바로 앞서 말한 '말씀의 육신화'를 통해, 특히 죽음과 같은 고난을 이겨내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인격과 삶에 자연스럽게 새겨지는 '예수의 흔적(스티그마)'입니다.

이 흔적은 고난을 통해 얻는 '그리스도인의 훈장'과도 같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학문 없던 어부 베드로의 어눌한 말 한마디가 수천 명의 가슴을 찔러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통렬한 외침을 끌어낼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의 삶에 새겨진 부활의 '증거'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이토록 대가를 치른 예수의 흔적이 있을 때, 우리의 평범한 말 한마디에도 영적인 권위와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능력이 깃들게 됩니다.

메세지

3. '말로 하는 전도'에서 '삶으로 하는 전도'로: 세 번째 전환점

3. 설득하려 애쓰지 말고 '살아있는 증인'이 되어라

삶에 새겨진 이 '스티그마', 즉 예수의 흔적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는 우리를 가장 중요한 역할로 이끌어줍니다. 바로 '살아있는 증인'의 역할입니다. '증인'은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그토록 강력했던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본 '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식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삶으로 확인한 실상을 증언했습니다.

이 원리는 특히 가장 가까운 가족 관계에 적용됩니다. 많은 자녀가 부모의 신앙을 외면하는 이유는 말이 아니라 삶에서 '증거'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변화된 인격, 고난 속에서도 말씀을 지켜내는 삶의 모습 자체가 자녀들에게는 그 어떤 설교보다 강력한 전도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먼저 '실상과 증거'를 가질 때, 비로소 우리의 증언은 힘을 얻습니다.

4. '남을 위한 기도'에서 '나를 위한 기도'로: 마지막 전환점

4. "그들을 바꿔주세요"라는 기도 대신 "저를 바꿔주세요"라고 기도하라

그렇다면 이 모든 변화의 사이클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요? 가장 실천적이고 근본적인 출발점은 바로 기도의 제목을 바꾸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자녀를 구원해주세요" 혹은 "저 사람을 변화시켜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 기도의 방향을 '나 자신'에게로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엔진과 같은 기도입니다.

"내가 예수를 잘 믿어 내 삶에 말씀의 증거가 나타나게 하시고, 그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스스로 회개하며 돌아오게 해달라."

이 기도가 왜 그토록 중요할까요? 이것은 타인이 아닌 '나'를 변화의 출발점으로 삼는 근본적인 신앙 태도의 전환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사실상 "하나님, 제 삶에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시고(1단계), 고난을 통해 예수의 흔적을 새겨 주시며(2단계), 그리하여 제가 살아있는 증인이 되게 하소서(3단계)"라고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먼저 말씀의 실상을 가진 증인이 되는 것, 그것이 내 주변을 변화시키는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길입니다.

결론: 맺음말

오늘 살펴본 4가지 전환점은 결국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그립니다. 진정한 신앙의 힘은 머리에 쌓인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되는 '실상과 증거'에 있습니다. 말씀을 살아내어('말씀의 육신화') 삶에 예수의 흔적('스티그마')을 새기고, 그 흔적의 힘으로 살아있는 '증인'이 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을 '나를 바꾸는 기도'로 시작하는 것. 이 모든 과정이 합쳐질 때,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 어떤 말보다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글을 마치며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오늘, 당신의 삶은 어떤 메시지를 증언하고 있습니까?"

 

https://youtu.be/iR0MGAtNwlA?si=KIDJcHnJbaLd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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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김동호목사님의 날마다 기막힌 새벽 (유튜브링크는 하단 참조)

 

사도행전 2장 22절 ~ 24절

  1.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3.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암 투병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한 목사의 고백에서 발견한 4가지 통찰

Introduction: The Anatomy of Despair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 깊은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나아갈 힘도, 이유도 찾을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는 주저앉고 맙니다. 김동호 목사 역시 그러한 깊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가 겪었던 가장 큰 고통이 육신을 파고드는 암 투병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과연 암보다 더한 고통은 무엇이었으며, 그는 그 절망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그의 고백 속에서 우리는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강력한 통찰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암 투병보다 더 끔찍했던 고통: '사람'이 주는 절망

김동호 목사가 경험한 첫 번째 통찰은, 항암 치료의 물리적 고통보다 교회 내 반대 세력으로부터 받은 정신적, 영적 고통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끔찍했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근원은 그가 추진했던 교회 개혁이었습니다. 기득권을 내려놓자는 그의 제안에, 기존의 권력을 지키려는 이들로부터 상상 이상의 거센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공식적인 노회 석상에서 한 선배 목사로부터 "대가리 피도 안 마른 자식"이라는 모욕적인 욕설을 듣는 등 극심한 언어폭력과 수치심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공격이 주는 정신적 고통은 그를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그는 당시를 스스로 "죽어지기를 사모하던 때"라고 표현할 만큼 극심한 절망에 빠졌습니다. 결국 그는 사표를 내고 "두 달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소파에 늘어져 지내기도 했습니다." 이 경험은 때로 질병이라는 물리적 시련보다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와 절망이 한 인간을 얼마나 더 파괴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2.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다: 파격적인 개혁의 본질

그렇다면 이토록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파격적인 개혁'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제안은 인간 중심의 권력 구조 자체를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신학적 판단은 명확했습니다. **"목사의 자리가 지나치게 보장되면 권력이 비대해지고 자리가 고착화되어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판단 아래 그는 다음과 같은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 목사 재신임 투표 실시: 6년마다 교인들에게 목사의 신임을 묻는 투표를 받도록 했습니다.
  • 원로 및 위임 목사 제도 폐지: 목사의 자리가 고착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존의 위임 목사와 원로 목사 제도를 없앴습니다.
  • 당회 권한의 분산: 목사와 장로 등 특정 기구에 집중된 권한을 분산시켜 민주적인 운영을 꾀했습니다.

이 개혁안들은 교회의 주인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오직 하나님 한 분이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의 실천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안정된 권력을 누리던 이들에게는 이는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여졌고, 이것이 그토록 살벌한 비난과 공격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와부활

3. 가장 깊은 절망에서 들려온 음성: "내가 너를 살린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두 달간 집 소파에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김동호 목사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그의 시선이 우연히 벽에 걸린 손바닥만 한 작은 십자가에 머물렀습니다.

그 완전한 무력감과 절망의 순간, 십자가는 더 이상 단순한 종교적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통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난 너 죽는 걸 못 본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는 살린다.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지"

이 음성은 죽음만을 생각하던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실제적인 능력이었습니다. 그 순간, 교과서 속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십자가가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는 강력한 힘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 체험을 통해 그는 십자가의 능력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어떤 수(십자가)를 써서라도 반드시 살려내신다는 강력한 '생명의 의지' 임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이자, 죽음이 이기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생명의 주관자로서의 신적 본성이었습니다.

4. "나는 그렇게 쉽게 망할 사람이 아니다": 십자가가 주는 자존감

십자가 체험을 통해 김동호 목사가 얻은 마지막 통찰은, 세상이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자존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새로운 차원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핵심적인 깨달음은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내가 이 정도 일로 망할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지도 않으셨을 것"

이 고백은 인간적인 오만함이 아닙니다. 이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사망에 매여 있을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 값으로 산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의 선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 값으로 구원받은 생명은 세상의 시련이나 사람들의 공격 따위로 쉽게 망가질 수 없는 귀한 존재라는 근원적인 자기 확신입니다. 이 깨달음은 그에게 모든 상처와 절망을 딛고 일어나 다시 목회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주었습니다.

Conclusion: Finding Strength in the Unlikeliest of Places

김동호 목사의 여정은 인간의 기득권이 만들어낸 절망과 하나님의 능력이 주는 생명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그는 암 투병보다 더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세상의 힘이나 성공이 아닌, 가장 연약해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습니다. 압도적인 절망감에서 시작하여 새롭게 된 소명 의식으로 나아간 그의 이야기는, 진정한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리고 그 힘이 우리에게 어떻게 사망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는지를 명확히 증거합니다.

당신의 삶을 무너뜨리는 '사람'과 '상황' 앞에서, 당신은 세상의 방식이 아닌 어떤 능력에 기댈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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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김동호목사님의 날마다 기막힌 새벽 (유튜브링크는 하단 참조)

 

사도행전 2장 21절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당신의 기도를 완전히 바꿔놓을 3가지 역설

서론: 기도가 막막하게 느껴질 때

기도가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해야 할 의무처럼 느껴지거나, 아무런 감흥 없는 독백처럼 공허하게 흩어질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유창하고 거룩한 기도를 드려야만 하나님이 들으실 것이라 생각하지만, 가장 깊은 기도의 신비는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언어가 가장 화려할 때가 아니라, 모든 언어를 잃어버린 침묵의 순간에 찾아옵니다.

한 평생 목회에 헌신한 목회자의 깊은 묵상 속에서 건져 올린, 우리의 기도 생활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놀랍고 역설적인 3가지 통찰을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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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잘하는' 기도보다 '진실한' 기도가 중요하다

기도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기도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려줍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아니라, ‘사람들 들으라고’ 하는 공연이었습니다. 그는 길거리에 서서 큰 소리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신앙인인지 자랑했습니다. 십일조와 금식 같은 자신의 업적을 나열하고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며 다른 이와 비교하며 우월감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 중심에 있는 과시욕을 아셨기에, 그 기도를 진정한 기도로 받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골방'의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힘은 유창함이나 길이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단순하고 진실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우리 안에도 기도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싶은 바리새인의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내려놓고 단순함과 진실함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의 진정한 소통을 여는 첫걸음입니다.

2. 때로는 '부르짖음'이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

한 평생 전통적인 장로교 목회자로 살아온 김동호 목사님은 어느 날 순복음교회 집회에 초청받았던 경험을 나누며,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자신과는 너무 다른 예배 스타일에 당황한 것입니다. 찬송은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불렀고, 사람들은 큰 소리로 손뼉을 치며 "주여 삼창"을 외쳤습니다. 처음에는 '교회를 잘못 찾아왔나' 싶을 정도로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뜨거운 부르짖음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저들의 마음 밭이 참 부드럽구나. 저렇게 부르짖고 큰소리로 뜨겁게 하는 동안에 마음 밭이 잘 갈아진 것 같더라고요.

이 경험은 기도에 '정답'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기도의 핵심은 진실함이지만, 그 표현 방식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뜨거운 부르짖음이, 우리도 모르게 쌓아온 형식주의의 벽을 허물고 하나님 앞에 감정의 중심까지 쏟아놓게 하는 유효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동기가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도가막힐때

3.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 가장 완벽한 기도가 시작된다

살다 보면 너무 큰 고통에 압도되어 기도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기도문 한 줄 쓸 수 없으며, 숨쉬기조차 버거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죄가 되기에 참고 견딜 뿐’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기도의 가장 위대하고 해방적인 진리가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런 순간에는 억지로 유창한 기도를 쥐어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장 단순한 행위, 그것 자체가 완전하고 완벽한 기도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약속을 들려줍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이것이 왜 그토록 강력할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입을 열기 전부터 우리의 필요를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한 문장이나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주여"라는 짧은 부르짖음 안에는 우리의 모든 고통과 절박함,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는 찬송의 고백처럼, "하나님 외에는 제게 아무런 도움이 없습니다"라는 가장 정직한 선언입니다. 여기서 '누구든지'라는 약속은 우리의 상태나 자격과 상관없이, 가장 비참한 순간에 있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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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기도는 증명이 아니라 고백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나의 신앙을 증명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화려한 언변이나 뜨거운 형식으로 포장된 퍼포먼스도 아닙니다. 기도는 그저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진실한 행위 그 자체입니다.

조용한 골방에서 드리는 진실한 고백이든, 굳은 마음을 깨뜨리는 뜨거운 부르짖음이든, 혹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터져 나오는 침묵의 이름 부름이든, 가장 가치 있는 기도는 "하나님, 당신 밖에는 나의 도움이 없습니다"라고 정직하게 시인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만약 오늘부터 기도를 '잘해야 하는 과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으로 여긴다면 당신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https://youtu.be/2EuGwEMbz5c?si=VFoz08-jHfRDqUx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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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 17절

  1.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70대에도 '전성기'로 사는 사람들의 비밀: 세상이 '미친 짓'이라 부르는 믿음에 관하여

서론: 왜 우리는 풍요 속에서 길을 잃는가

우리는 구독 서비스와 배달 앱으로 가득 찬 삶을 영위하지만, 각종 설문조사는 한 세대가 자신의 가장 좋은 시절은 이미 끝났다고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역설입니다. 만약 돈과 세상의 풍요가 인간에게 진정한 꿈과 환상을 줄 수 있다면, 지금 우리는 모두 꿈속에서 살아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이 모순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진정한 소망과 삶의 동력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이 글은 그 질문에 대한 놀랍고도 역설적인 해답을 탐구합니다. 세상의 상식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으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전성기'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밀,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강력한 믿음의 원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 가장 위대한 시작은 '무모한 돌 던지기'에서 온다

보이지 않는 것을 현실로 만드는 믿음의 여정은, 맹목적인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 영적 통찰을 얻은 후의 행동은 종종 세상의 눈에 무모한 '간척 사업'처럼 보입니다. 망망대해에 돌멩이 하나를 던지는 행위를 상상해 보십시오. 돌은 그저 '풍덩' 소리를 내며 사라질 뿐, 바다는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무모해 보이는 행위를 20년, 30년간 꾸준히 지속하면 어떻게 될까요? 보이지 않던 바닷속에서 돌들이 쌓여 수면 위로 올라오고, 마침내 파도가 넘실대던 바다는 단단한 '육지'라는 '실상과 증거'로 변모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작동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꾸준히 '순종의 돌'을 던질 때,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즉각적인 결과와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의 통념 속에서 이 비유는 깊은 성찰을 제공합니다. 진정한 창조는 눈앞의 성과가 아니라, 시간과 인내를 통해 증명되는 거룩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첫걸음은 종종 세상의 평가와는 전혀 다른 시각을 요구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엉뚱하거나 말도 안 되는 일, 혹은 **‘새 술에 취한 사람의 미친 짓’**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2. 인생의 '전성기'는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인생의 전성기는 젊은 시절 단 한 번뿐이며, 나이가 들수록 쇠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통념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과거의 영광에 머물거나 지나간 젊음을 그리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이끄실 내일과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정점'을 궁금해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의 산물이 아니라, '늙은이도 꿈을 꾸리라'는 약속을 삶으로 증명하시는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이자 초자연적인 결과입니다. 성령의 임재 안에서 40대도, 60대도, 80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순간은 새로운 전성기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글의 영감이 된 저자는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일이 보이고 꿈을 꾸고 있다"고 고백하며, 이 원리가 실제 삶의 증거임을 보여줍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향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삶, 그렇다면 이토록 강력한 생명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 해답은 놀랍게도 우리 욕망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에 있습니다.

3. 가장 강력한 동기는 '거룩한 욕심'이다

많은 사람이 영적인 공허함과 무기력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설적이게도 그 근본 원인은 '간절함'의 부족에 있고, 그 간절함이 없는 이유는 우리의 욕심이 온통 엉뚱한 곳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성공, 물질적 풍요에는 애타게 매달리면서도 영적인 세계에는 무관심합니다. 더 큰 비극은, 하나님이 가장 주고 싶어 하시는 선물인 성령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욕심의 방향'을 바꾸는 데 있습니다. 바로 '거룩한 욕심'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에 대해 뜨거운 욕심과 갈망을 가져야 한다는 통찰입니다. 부정적으로 여겨지던 '욕심'이라는 단어를 영적 성장의 동력으로 재해석한 이 관점은 실로 놀랍습니다.

진정한 변화를 향한 마음은 복잡한 지식이 아닌,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하고 간절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저자의 아들이 친구들처럼 은사를 받지 못하자 속상한 마음에 옥상 바닥에서 뒹굴며 떼를 쓰듯 기도했던 것처럼, 순수한 갈망으로 하나님께 매달릴 때 비로소 영적인 문이 열립니다. 바로 이 '거룩한 욕심'이 마침내 우리의 영적 시야를 열어, 환경이 아닌 '보는 것'이 현실을 결정하는 새로운 차원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믿음의 간척

4. 당신의 현실은 환경이 아니라 '보는 것'이 결정한다

우리의 행복과 절망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대부분은 경제적 조건이나 사회적 위치 같은 외부 환경이 전부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통해 하나님 나라라는 다른 현실을 체득한 사람들은 다르게 말합니다. 이들은 다른 현실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다른 현실을 '살아냅니다'.

이들에게 현실은 통장 잔고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로 정의됩니다. 이 내면의 비전이 외부 세계보다 더 실재가 되어, 마침내 환경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실상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높은 산, 거친 들, 초막이나 궁궐 같은 세상의 형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이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더 나은 환경을 갖기 위해 분투하지만, 환경이 나아져도 내면의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이는 진정한 소망과 안정감이 환경의 변화가 아닌 내면의 관점 변화, 즉 '보는 것'의 변화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내면의 힘은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에 의해 결정됩니다.

결론: 당신의 바다는 어디입니까?

70대에도 청년처럼 꿈을 꾸며 '전성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밀은 하나의 강력한 경로로 요약됩니다. 그들은 외부 환경이 아닌 내면의 영적 회복에서 삶의 동력을 찾습니다.

세상이 '미친 짓'이라 부를지라도 보이지 않는 약속을 믿고 '믿음의 간척'을 시작하는 용기에서 출발하여, 그 여정을 '거룩한 욕심'으로 불태우고, 마침내 환경이 아닌 '보는 것'이 현실을 결정하는 확신에 이르는 삶. 그리고 그 결과로 과거가 아닌 미래의 정점을 향한 '평생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시선을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돌릴 때 시작되는 삶의 기적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이라는 바다에, 비록 지금은 무모해 보일지라도 미래의 육지를 위해 던져야 할 '순종의 돌'은 무엇입니까? 그 첫 번째 돌을 던지는 순간, 당신의 새로운 전성기는 이미 시작됩니다.

 

 

https://youtu.be/G2LjPHbRKJE?si=hM46CvzC6J0A_5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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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 5절 ~ 13절

  1.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2.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3.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4.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5.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6.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7.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8.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9.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 어쩌면 최고의 칭찬일지 모릅니다: 성령에 취해 산다는 것의 4가지 역설

Introduction: 우리 모두는 무언가에 '취해' 산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에 깊이 빠져, 즉 '취하여' 살아갑니다. 어린 시절, 저는 주벽이 있는 아버지 때문에 '취한다'는 것에 본능적인 공포와 혐오감을 가졌습니다. 제정신을 잃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모습은 제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술주정이 아니라, 존경하는 어른이 가장 온전해야 할 '정신'을 잃어버리는 모습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생 의식적으로 '취하는' 것을 경계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제 삶 역시 열정적인 '취함'의 순간들로 가득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그 대상이 파괴가 아닌 생명을 향해 있었다는 점이 달랐을 뿐입니다. 운동에 취해 점심을 거르고 6시간씩 테니스를 치기도 했고, 음악에 취해 밤을 새우며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고 느낄 만큼의 감동에 젖기도 했습니다. 좋은 책 한 권에 취해 완전히 소화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고 다른 이에게 가르치며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무언가에 깊이 몰입하는 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님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깊고 완전하며, 삶을 변화시키는 몰입의 대상은 무엇일까요? 만약 인생을 가장 온전히 사는 방법이, 전혀 다른 무언가에 '취하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바로 '성령에 취한다'는 이 급진적이고도 본질적인 개념을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1. 역설 1: 당신이 '제정신'이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왜곡된 상태일 수 있다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역설부터 시작해 봅시다. 우리가 흔히 정상이라고 말하는 '제정신'은 사실 죄로 인해 타락하고 왜곡된 상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기준 자체가 뒤바뀌어 버린 정신 상태 말입니다.

이에 반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제정신'은 세상적인 의미의 멀쩡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거듭나 비로소 회복된 상태, 즉 하나님의 정신과 영, 그리고 그분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쌓아 올린 지혜와 상식의 기반을 흔드는 선언입니다. 나의 가장 합리적인 판단조차 죄의 중력에 이끌려 왜곡되었을 수 있음을 인정하라는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도전은 절망이 아닌 희망의 시작입니다. 나의 정신이 아닌, 하나님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취한 삶

2. 역설 2: 인생을 망치는 중독 vs. 삶을 살리는 몰입

세상에는 두 종류의 '취함'이 있습니다. 하나는 파괴적인 중독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몰입입니다. 술, 마약, 도박과 같은 세상적인 중독은 사람의 제정신을 잃게 하고, 엉뚱한 말을 내뱉게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과 공포를 안겨줍니다. 그 끝은 결국 인생의 파멸입니다.

하지만 성령에 취하는 것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습니다. 그것은 삶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고, 세상적인 욕심과 돈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의 삶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에 유익을 줍니다.

세상의 눈에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은 '진정한 제정신'을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죄로 인해 뒤바뀐 가치관을 바로잡아 하나님의 영과 마음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른 정신으로 사는 법입니다.


3. 역설 3: 세상의 보물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된다

'성령에 취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가치관의 근본적인 혁명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120명의 제자들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그들은 이전까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돈과 세상적인 성공을 '배설물'처럼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가치관의 혁명은 곧장 삶의 방식으로 흘러넘쳤습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자, 자신의 것을 나누는 '유무상통'은 의무가 아닌 가장 기쁘고 당연한 삶의 표현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세상이 '취했다'고 비난했던 그 모습이야말로 그들이 '진정한 제정신'을 되찾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4. 역설 4: 믿는 것이 아니라 '맛보아' 알아야 한다

이 거룩한 취함은 의무감으로 가득한 건성 신앙으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머리로 믿는 것을 넘어, 온몸으로 '맛보아 아는' 체험적인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테니스의 짜릿한 '맛'을 알아야 점심도 거르고 여섯 시간을 뛸 수 있고, 음악의 깊은 '맛'을 알아야 밤을 새워 몰입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것의 진짜 '맛'을 깊이 경험해야만 평생 하나님께 취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을까요? 제 삶을 통해 붙잡게 된 몇 가지 통로가 있습니다.

  • 말씀에 취하기: 말씀을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될 때까지 읽고 또 읽으며, 나아가 다른 이에게 가르쳐보십시오. 지식으로만 머물던 말씀이 나의 영과 삶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 찬양에 취하기: 밤을 새워 찬양에 깊이 몰입하는 '철야 찬양'과 같이, 모든 것을 잊고 오직 은혜에만 젖어 드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이는 신앙의 근간을 세우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 기도에 매달리기: 자신의 연약함이나 한계 앞에서 물러서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것을 붙들고, 때로는 고집스럽다 싶을 만큼 하나님께 매달리며 돌파를 구할 때, 우리는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게 됩니다.

Conclusion: 당신의 삶은 무엇에 취해 있습니까?

진정한 영적 삶이란 모든 종류의 취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올바른 대상에 제대로 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 안에서의 깊은 몰입이며, 이 몰입은 죄로 왜곡된 우리를 '진정한 제정신'으로 회복시키고 삶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성령에 취한 삶은 세상의 눈에는 이상하고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가장 온전한 현실인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살아내는 가장 실제적인 길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당신을 파괴적인 중독으로 이끌고 있습니까, 아니면 삶을 살리는 거룩한 몰입으로 이끌고 있습니까?"

 

https://youtu.be/GT_uNUSngsA?si=URXahlwpHg4d23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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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 1절 ~ 4절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장 1절에서 4절 말씀을 바탕으로, 성령 강림이 가져온 변화와 그로 인해 회복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을 5가지 핵심 주제로 정리해 드립니다.

1. 바벨탑 사건의 회복: 언어의 혼잡에서 마음의 통함으로

성령 강림 사건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과 정반대되는 회복의 역사입니다.

  • 바벨탑의 형벌: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려 했을 때,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사람들을 흩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을 넘어,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해 마음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 오순절의 회복: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게 나타난 방언은 흩어졌던 언어가 다시 하나로 묶이는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다시 마음이 통하게 되었고, 흩어지는 대신 모이기를 힘쓰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2. 성령 충만의 본질: 가치관과 영적 분별력의 변화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근본적인 영이 바뀌는 것입니다.

  • 분별력의 회복: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참과 거짓, 진짜 복과 가짜 복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 가치관의 변화: 성령으로 거듭나면 세상적인 욕심이 사라지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며, 생각과 가치관, 인생관이 하나님의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3. 하나님 나라의 실현: 유무상통과 평화

하나님 나라는 환경이 바뀌어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이 성령으로 거듭날 때 그 자리에서 즉시 이루어집니다.

  • 욕심의 제거: 성령을 통해 욕심이 없어지면 다툼이 사라지고 사랑과 평화가 임합니다.
  • 초대교회의 모습: 자신의 것을 내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각자의 필요를 따라 함께 쓰는 '유무상통'의 공동체가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4. 하나님의 형상 회복: 하나님을 닮은 증인의 삶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창조 당시의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게 됩니다.

  • 하나님을 닮음: 하나님의 형상은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영, 생각,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 말과 행동의 변화: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길입니다.

5.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 (거룩한 욕심)

우리가 평생 예수를 믿어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세상의 욕심은 가득하지만, 정작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거룩한 욕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 우리가 간절히 사모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 우리가 머무는 가정과 직장, 그리고 교회가 기적처럼 하나님 나라로 변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전 대화에서 말씀드린 '데오빌로(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마음과 '증인'의 삶은 결국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가치관을 소유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이 소스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과 오순절 성령 강림은 어떤 관계가 있나요?

바벨탑 사건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정반대되는 성격의 역사이자, 전자가 초래한 비극을 후자가 치유한 '회복의 관계'**에 있습니다. 소스에 기초한 두 사건의 구체적인 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언어의 혼잡에서 마음의 통함으로의 회복

바벨탑 사건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려 했던 오만함에 대한 형벌로 언어가 혼잡해지고 소통이 단절된 사건입니다. 단순히 말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을 넘어,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해 서로의 '마음'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이 바벨탑 사건의 본질적인 비극이었습니다. 반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방언을 함으로써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소통하게 된 '언어의 회복' 사건입니다.

2. 흩어짐에서 모임으로의 변화

바벨탑 사건의 결과로 인류는 온 지면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하나가 된 사람들이 **다시 모이기를 힘쓰는 공동체(초대교회)**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즉, 성령은 바벨탑이 갈라놓았던 인류를 다시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습니다.

3. 이기적 욕심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바벨탑을 쌓게 만든 근본 원인은 "내가 주인이 되겠다"는 이기적인 욕심이었습니다. 이 욕심은 분별력을 상실하게 하고 다툼과 갈등을 초래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이러한 세상적인 욕심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거듭나게 함으로써, 자신의 것을 내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나누는 '유무상통'의 공동체, 즉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켰습니다.

4. 하나님의 형상 회복

바벨탑 사건이 하나님의 영을 상실하여 인간이 어리석어지고 분별력을 잃은 사건이라면,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는 사건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과 가치관을 갖게 되어,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닮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바벨탑 사건이 죄로 인해 인간관계와 신인관계가 파괴되고 흩어진 사건이라면,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성령을 통해 그 관계가 회복되고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가 다시 시작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벨탑에서 오순절로

성령을 통한 유무상통의 삶은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실천될까요?

소스에 따르면, 성령을 통한 **'유무상통(有無相通)'**의 삶은 단순히 물질을 나누는 경제적 행위를 넘어, 성령으로 인한 내면의 변화가 일상의 관계와 가치관 속에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기적 욕심을 버리고 '나의 것'이라는 집착 내려놓기

유무상통의 핵심은 이기적인 욕심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이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욕심에서 비롯된 분열이었다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더 이상 자신의 것으로만 주장하지 않게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내가 가진 물질이나 재능을 나의 독점적 권리로 여기지 않고,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나누려는 가치관의 근본적인 변화가 실천의 시작입니다.

2. '마음이 통하는 소통'을 통한 관계 회복

바벨탑 사건으로 깨어졌던 소통이 성령을 통해 회복되었듯이, 현대 사회에서 유무상통을 실천하는 것은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을 섞는 것을 넘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써 흩어지기보다 모이기를 힘쓰는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이 유무상통의 현대적 실천입니다.

3. 일상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유무상통의 삶은 특별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영이 바뀔 때 즉시 이루어집니다.

  • 가정과 직장: 내가 머무는 곳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으로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 봉사와 섬김: 누군가를 도울 때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타인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4. '세상 복'이 아닌 '진짜 복'을 추구하는 분별력

성령을 받으면 무엇이 참된 복인지 분별하는 영적 지혜가 생깁니다. 세상의 것들을 절대적인 가치로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우선순위에 둘 때, 우리는 물질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유무상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욕심 대신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거룩한 욕심'**을 가질 때, 우리의 삶은 기적처럼 하나님 나라로 변하게 됩니다.

5. 삶의 흔적(증거)을 남기는 실천

말씀이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고 **'삶의 영'**이 되어야 합니다. 이전 대화에서도 언급되었듯, 하나님을 가족처럼 사랑하고 그분을 일상의 '식구'로 인정하며 내 삶의 몫을 나누는 구체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실상과 증거들이 쌓일 때, 현대 사회의 각박한 현장 속에서도 초대교회와 같은 유무상통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현대 사회에서의 유무상통은 성령을 통해 나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하나님의 것으로 바뀌어, 내가 가진 것을 기쁨으로 나누고 주변 사람들과 마음으로 소통하며 그 자리를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가는 삶을 통해 실천됩니다.

 

https://youtu.be/Ejm4ztJl_gM?si=YfMtNDPmzdZzKFB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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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장 15절 ~ 20절

  1.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2.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3.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4.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5.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사도행전 1장 15절에서 20절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숫자의 의미와 '불의한 재물'의 위험성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을 3가지 핵심 주제로 정리해 드립니다.

1. 하나님이 감동하신 숫자, "120명이나"

저자는 사도행전 1장 15절에 기록된 **'120명이나 모였더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 숫자의 가치: 세상적인 기준으로 120명은 적은 숫자일 수 있으나, 성경이 '이나'라는 표현을 쓴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매우 크고 귀하게 여기셨음을 의미합니다.
  • 순종의 무게: 당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모여 있는 것은 죽음과 핍박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도 말씀을 지켜낸 그들의 순종을 보시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 거룩한 욕심: 우리는 좋은 대학이나 성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쏟지만, 정작 하나님이 귀히 보시는 '120명'의 명단에 들어가려는 영적인 욕심은 부족하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2. 가룟 유다와 '불의의 삯'의 최후

예수를 판 가룟 유다의 사례를 통해 정당하지 못한 재물이 가져오는 비참한 결과를 경고합니다.

  • 아겔다마(피밭):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은 삼십'은 불의한 삯이었으며, 그것으로 산 밭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고 버려진 '피밭'이 되었습니다.
  • 비참한 죽음: 불의한 재물을 취한 결과는 결국 생명을 보전하지 못하고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오는 비참한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 미끼와 덫: 불의한 삯은 당장 이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생을 망가뜨리는 **'덫에 걸린 미끼'**와 같습니다.

3. '깨끗한 돈'에 대한 영적 민감성

우리가 신체 건강을 위해 깨끗한 물과 음식을 찾는 것처럼, **영적 건강을 위해 '돈의 청결함'**을 따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 유기농과 생수: 현대인은 몸을 해치지 않기 위해 유기농 채소, 생수, 공기청정기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 돈의 위생: 그러나 정작 영혼을 병들게 하는 '불의한 돈'에 대해서는 욕심 때문에 눈이 어두워질 때가 많습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말은 틀린 말이며, 불의하게 번 돈은 결코 건강한 삶을 만들어줄 수 없습니다.
  • 정직한 수고의 복: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축복은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 것이며, 정직하게 땀 흘려 얻은 소득에 자족하며 감사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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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120인

요약 및 결론

이전 대화에서 다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데오빌로)'**가 세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 세상의 다수를 따라가기보다, 비록 좁은 길일지라도 하나님이 귀히 보시는 '120명'의 순종을 선택해야 합니다.
  2. 물질적인 풍요보다 **'돈의 정직함'**을 우선시하며, 불의한 이익은 영혼을 죽이는 독과 같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는 **'십자가 군병'**과 같은 자세로 일상의 사도행전을 써 내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120명'의 명단에 들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120명’의 명단에 들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성공을 향한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거는 **‘거룩한 욕심’과 ‘정직한 삶’**이 필요합니다. 소스에 근거한 구체적인 노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거룩한 욕심’을 품고 영적 우선순위 설정하기

세상 사람들은 좋은 대학이나 일등이 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쏟지만, 정작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명단에 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 구체적 노력: 세상적인 욕심 대신, 하나님이 "야, 120명이나 모였어"라고 감탄하실 만한 영적 소수(Remnant)에 포함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2. 위험과 손해를 감수하는 ‘거룩한 순종’

당시 120명의 문도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모여 있었던 것은 죽음과 핍박을 각오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 구체적 노력: 환경이 어렵거나 나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는" 십자가 군병과 같은 자세로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 좁은 길 선택: 다수가 가는 편한 길이 아니라, 비록 고난이 예상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3. ‘불의한 삯’을 거절하고 ‘깨끗한 돈’을 추구하기

가룟 유다처럼 눈앞의 이익을 위해 신앙을 저버리는 것은 '덫에 걸린 미끼'를 무는 것과 같습니다.

  • 구체적 노력: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세속적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식과 법대로 번 ‘깨끗한 돈’**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 정직한 수고: 일확천금을 바라기보다 자신의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 복을 귀하게 여기며, 정직하게 땀 흘려 얻은 소득에 자족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 영적 건강을 위한 철저한 분별력

우리가 몸의 건강을 위해 유기농 채소나 생수를 고집하는 것처럼, 영혼의 건강을 위해 돈의 청결함을 따져야 합니다.

  • 구체적 노력: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은 결국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피밭(아겔다마)’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돈의 위생과 정직함에 대해 영적으로 민감해져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귀히 보시는 120명의 명단에 드는 법은 이전 대화에서 다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데오빌로)'**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에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고 **삶의 정직한 흔적(스티그마)**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120명이나 되는 귀한 자들"이라며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피밭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경고는?

가룟 유다가 불의한 재물로 산 **'아겔다마(피밭)'**는 오늘날 우리에게 물질에 대한 태도와 영적 생명에 관한 엄중한 경고를 줍니다. 소스에 근거한 주요 영적 경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불의한 재물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허망함'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은 삼십'은 스승을 배반하고 얻은 **'불의의 삯'**이었습니다. 그는 이 돈으로 밭을 샀으나, 그 밭은 아무도 돌보지 않고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버려진 땅인 '피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쌓은 재물은 겉으로 보기엔 화려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인생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황폐한 결과만을 가져온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2. 영혼과 생명을 해치는 '독'

소스는 우리가 신체 건강을 위해 깨끗한 물과 유기농 음식을 찾는 것처럼, **'돈의 위생'**도 철저히 따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 비참한 최후: 불의한 재물을 취한 유다는 결국 몸이 곤두박질하고 배가 터져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 영적 건강의 파괴: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세속적 격언은 틀린 말이며, 불의하게 번 돈은 결코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만들거나 생명을 보전해주지 못합니다.

3. '덫에 걸린 미끼'와 같은 유혹

불의한 삯은 당장 눈앞에서는 큰 이익과 기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생을 망가뜨리는 **'덫에 걸린 미끼'**와 같습니다.

  • 많은 사람이 미끼에 눈이 어두워 정당하지 못한 이득을 탐하다가 결국 인생 전체가 덫에 걸려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 따라서 일확천금을 꿈꾸기보다 **자신의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 '정직한 복'**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4.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가치와의 대조

가룟 유다의 피밭 사건은 앞서 언급된 '120명'의 순종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 120명의 문도는 죽음의 위험과 손해를 무릅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 반면 유다는 물질적 욕심 때문에 직분을 잃고 거처가 황폐해지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세상의 물질적 풍요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거는 '거룩한 욕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결론적으로 아겔다마는 **"돈이 깨끗해야 영혼도 건강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불의한 이익에 눈멀지 않고, 자족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땀 흘려 얻은 소득에 감사하는 삶이 진정으로 생명을 보전하는 길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ItFGS5aUmgc?si=90gbqIKe0cD5tM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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